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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개요
-역사
-대학생활
-특성
-개요
컬럼비아대학교는 미국 뉴욕주 뉴욕시에 있는 연구 중심 사립 종합대학교이다.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에 속한 명문이다.
1754년 뉴욕 트리니티 교회를 근거지로 설립된 컬럼비아대학교는 뉴욕주에서 첫 번째이자. 미국에서 다섯 번째로 오래된 고등교육기관이다.
독립선언 이전에 설립된 9개 식민지 대학 중 하나이다. 1784년 킹스칼리지에서 컬럼비아대학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896년 뉴욕시 모닝사이드 하이츠에 있는 현재의 캠퍼스로 이전한 뒤 컬럼비아대학교로 개칭됐다.
컬럼비아대학교의 과학자와 학자들은 두뇌-컴퓨터 인터페이스, 레이저, 핵 자기 공명, 최초의 핵분열반응 등 과학적 발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컬럼비아는 학부과정이 있는 3개 대학과 13개의 대학원 및 전문대학원등 총 20개의 대학 및 대학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컬럼비아는 미국대학협회의 창립회원으로 미국에서 최초로 석사학위를 수여한 학교이다.
2023년 유에스뉴스&월드리포트 세계대학순위에서 7위에 올랐으며, 2022년 대학기금은 133억 달러에 달했다.
-역사
뉴욕 지방에 대학을 설립하려는 논의는 1704년부터 시작됐다. 허드슨강 건너 뉴저지주에 뉴저지대학(프린스턴대학으로 개명)이 세워진 뒤에야 뉴욕시는 대학 설립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1746년 뉴욕시 의회에서 새 대학 설립을 위한 기금 마련 법안이 통과됐다. 1751년 의회는 10명의 뉴욕시민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임명했다.
7명의 영국 국교회의 일원이었으며, 이들은 주 복권으로 발생한 기금을 대학 설립에 보내도록 했다.
1754년 처음으로 수입이 열렸으며, 초대 총장 사무엘 존슨 박사가 주고나 했다. 존슨 박사는 불과 8명의 학생으로 구성된 첫 수업의 유일한 강사였다. 수업은 트리니티 교회에 인접한 새 학교건물에서 진행됐는데, 학교는 현재 맨해튼의 브로드웨이 아래쪽에 자리했다.
대학은 1754년 조지 2세 왕의 왕실 헌장에 의해 킹스 칼리지로 설립됐으며, 뉴욕주 최초이자 미국에서 다섯 번째로 오래된 고등교육기관이 되었다. 1775년 독립전쟁이 발발해 8년간 수업이 중단됐다. 수업 중단은 뉴욕시를 점령한 영국군이 1783년 떠날 때까지 지속됐다.
대학도서관은 약탈되었고, 유일한 건물은 처음에는 독립군, 후에는 영국군에 의해 병원으로 사용됐다. 찰스 잉글리시 주교가 이끄는 일부가 노바스코샤의 윈저로 도망가서 왕립 학교를 세웠다.
독립혁명 이후 대학은 활력을 되찾기 위해 뉴욕주로 눈을 돌렸으며, 주가 학교 헌장에 요구하는 어떠한 변화도 수용하겠다고 약속했다. 주의회는 대학 지원에 동의했으며, 1784년 이전까지 킹스칼리지로 불린 대학에 일정한 특권을 부여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법은 킹스칼리지의 소생을 감독하기 위한 감독위원회를 만들었고, 새 공화국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전까지 킹스칼리지로 불린 뉴욕시의 대학은 앞으로 영원히 컬럼비아대학으로 불릴 것이라고 규정했다.
컬럼비아는 아메리카를 대체하는 이름이었다.
1787년 사무엘 존슨 박사의 아들 윌리엄존슨이 새 총장으로 선출됐다. 1789년 조지 워싱턴 대통령과 존 애덤스 부통령이 미국 독립에 관여했던 이 학교의 많은 동문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졸업식에 참석했다.
1790년대 뉴욕시가 연방 미 주 수도가 되면서 부활한 컬럼비아대학은 버낭했다. 1813년 대학은 의과대학을 내과 및 외과 의학대학과 합병해 새로운 컬럼비아대학교 내과 및 외과 의과대학을 만들기로 했다.
19세기 내내 대학의 등록과 구조, 학문은 정체 상태를 보였고, 많은 대학총장들이 대학 운영 방식을 거의 바꾸지 않았다. 1857년 파크 플레이스의 킹스칼리지 캠퍼스는 49번가와 메디슨 애비뉴에 있는 캠퍼스로 이전했으며 이후 40년간 머물렀다.
19세기 후반에 F.A.P버나드 총장의 지도 아래 대학은 급속히 현대적 대학교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시기 뉴욕시 부동산에 대한 투자는 주로 도시 인구의 증가에 힘입어 꾸준히 학교수입의 첫 번째 원천이 되었다. 세스 로우총장은 49번가 캠퍼스를 현재의 위치인 모닝사이드 하이츠 개발지의 더 넓은 캠퍼스로 이전했다. 로우의 후임인 니콜라스 버틀러의 40년 지도 아래 컬럼비아대학교는 급속도로 국가의 주요 연구기관이 되었고, 후에 여러 대학교들이 채택할 거대 대학교 모델을 구축했다.
존 더닝과 I, 라비, 엔리코 페르미, 폴리카르프 쿠시 교수들의 연구에 힘입어 컬럼비아의 물리학과는 1940년대에 맨해튼 프로젝트가 된 최초의 원자로가 건설된 후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혼란 속에 국제관계의 규칙이 대학교의 주요 학문적 초점이 되었고, 이에 따라 1946년 정치학, 경제학, 역사학 교수진을 모아서 국제 미 공공문제 대학원이 발족됐다.
1960년대 대규모 학생운동이 일어났으며, 1968년 봄 수백 명의 학생들이 대학 건물을 점거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20세기 후반에 주요 연구대학으로 발전하면서 학문적, 구조적, 행정적 변화를 크게 겪었다. 19세기 내내 대학교는 정치학과 철학, 순수과학을 전문으로 하는 분권적이고 분리된 대학들로 구성됐다. 1979년 이 대학들은 인문 및 과학대학원으로 통합됐다. 1991년 컬럼비아대학, 교양대학, 인문 및 과학대학원이 통합되어 인문 미 과학대학이 되었으며, 이는 학문적 통합과 대학들의 통합관리로 이어졌다.
메인 캠퍼스인 모닝사이드 하이츠 캠퍼스의 몇몇 건물은 미국 사적지에 등재되어 있다. 로우 메모리얼 도서관은 국가의 역사적인 랜드마크이자 캠퍼스의 중심축으로서 건축적인 의미를 보유하고 있다.
물리학과와 천문학과가 있는 퍼핀 홀은 또 다른 역사적 랜드마크이다. 이곳에서 엔리코 페르미에 의해 우라늄 분열의 첫 실험이 실행됐다.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세계 최초로 원자가 쪼개진 후 열흘 만에 이곳에서 우라늄 원자가 쪼개졌다.
-대학생활
컬럼비아의 학부 및 대학원 연구는 대부분 모닝사이드 하이츠 캠퍼스에서 이뤄지는데 이는 모든 학문을 한 장소에서 가르치는 하나의 대학교 캠퍼스라는 19세기말의 비전에서 비롯됐다.
메인 캠퍼스는 뉴욕시 모닝사이드 하이츠의 6개 이상 블록, 13만 m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웃에는 여러 학술기관이 있다. 대학 측은 이곳에 7800여 개의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교수와 직원, 대학원생을 위한 거주공간이다. 24개의 학부 기숙사는 캠퍼스 또는 모닝사이드 하이츠에 있다.
캠퍼스 내 주택은 학부생의 경우 4년 내내 보장된다. 학부과정이 있는 컬럼비아대학과 공학 및 응용과학대학은 캠퍼스 내 기숙사를 공유한다.
1학년들은 대부분 사우스론 주변에 위치한 대규모 기숙사 중 한 곳에서 기거한다.
상급생들은 방 선택에 참여하는데 복도형 또는 아파트형 주택 중 하나를 친구들과 선택할 수 있다.
교양대학과 대학원들은 주변에 독자적인 아파트형 주택을 보유하고 있다.
학교에는 수많은 남학새 ㅇ사교클럽, 여학생 사교클럽, 남녀공동 그리스 조직이 있다. 컬럼비아대학교 떠오르는 기업가조직은 1999년 결성됐다. 학생들이 운영하는 이 단체는 캠퍼스에 기업가 정신을 함양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단체는 매년 벤처경진대회인 #스타트업컬럼비아, 디자인과 엔지니어링, 기업가정신에 관심 있는 학부생을 위한 주말행사인 이그나이트@CU 등 수시 개의 행사를 개최한다.
버틀러도서관은 대학 내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며, 대규모 대학건물 중 하나이다. 1934년 완공 되었으며. 1946년 니콜라스 머레이 버틀러도서관으로 명명됐다. 컬럼비아대의 도서관들은 2022년 기준으로 총 1550여만 건의 장서와 디지털 자료를 보유해 미국 사립 연구도서관 가운데 3번째로 규모가 크다.